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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영의 논술개런티] 소설 ‘기억전달자’, 인간을 위하는 것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기괴함

작성자 관리자 2023-09-27




비룡소 제공.

▲ 비룡소 제공.




모든 인간은 감각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에 의해 인식되는 세상이 진짜라고 믿는다. 마치 동굴의 속에서 결박된 죄수들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플라톤 플라톤은 소트라테스의 죽음 이후 충격을 받고 28살에 아테네를 떠나 그리스 곳곳을 여행하며 철학자, 수학자, 성직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깨달음을 얻게 된다. 40세가 되던 해에 고향 아테네로 돌아와 ‘아카데미아’를 세우고 후학들을 양성,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출해낸다. 


의 ‘동굴의 비유’다. 얼핏 듣기엔 감각으로 세상의 실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겠지만 세상을 제한된 환경 속에서 그림자로 인식해온 사람이라면 동굴 밖 진짜 세상을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로이스 라우리의 소설 ‘기억전달자’ 속에 나오는 마을은 마치 플라톤이 비유한 동굴과도 같다.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여 있는 죄수와 같이 모든 것을 통제받는 상태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은 전쟁, 굶주림, 가난, 차별 등의 사회악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 유지되고 있는 미래의 어느 마을에 살고 있다. 진짜의 세상과 철저하게 분리가 된 채 말이다. 겉으로 볼 때 이들은 아주 행복하고 평화로운 완벽한 세상 속에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 마을 사람들은 사랑, 우정과 같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통제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개인의 선택과 자유 이런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배제된 삶 말이다. 심지어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를 가질 수도 없다. 아이가 갖고 싶으면 신청, 배급받는 시스템이며 직업 역시 자신의 선택이 마을에 의해 정해진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빼앗기고 잃어버렸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마을은 식량부족, 빈곤 혹은 전쟁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아를 제한한다. 이를 안정적으로 제도화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고, 약을 통해 성욕을 통제해버린다. 인구를 줄이고자 의도적으로 사회악을 조장하는 것이다. 또한, 마을 사람들은 배우자를 선택할 수 없고 자기 마음대로 아이를 낳을 수도 없다. 이곳에서는 산모라는 직위를 부여받은 사람만이 출산을 할 수가 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보육원에서 일제히 공동 양육된다. 


마을의 영예라 할 수 있는 노인의 ‘임무해제’는 사실상 안락사를 의미한다. 일정 나이가 되고 기력이 없고 노쇠해지면 정맥 주사를 맞고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기, 그리고 쌍둥이 중 몸무게가 적은 아이도 모두 마찬가지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의 죽음에 대해 못한다. 마을이 신체조건, 장애인, 노인에 대한 차별적 요소를 없애기 위해서 이들을 제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마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늘 같은 상태(Sameness)’다. 사람들에게 빈부, 성별, 직업에 따른 그 어떤 차등 없이 모두가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을 보장하고 이것이 늘 유지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늘 같은 상태(Sameness)가 깨지는 상황에 대비해 기억보유자라는 아주 독특한 직위의 사람을 뽑는다. 이들은 진짜 세상의 기억을 품고 있다가 마을에 문제 상황이 발생하면 그들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얻어진 지혜를 통해 비상 상태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조너스는 12살이 되던 해 이 직위를 받게 된다. 그렇게 햇빛, 굶주림, 전쟁, 공포, 사랑, 즐거움 등의 감각과 감정을 보유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면서 마을의 상황을 불편한 진실로 인식해버린다. 남들이 가질 수 없는 기억을 보유하고, 감정을 느끼게 된 조너스는 마을 사람들한테 이러한 상황을 알려주고자 한다. 차별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는 궤변적 사회를 용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은 그렇게 자유 의식이 폭발해버린 조너스를 위험인물로 간주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인간의 선택은 늘 잘못된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사람을 기계처럼 만든 마을 속에서 조너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고 만다. 결국 그는 마을의 경계를 넘어버리며 마을의 가장 큰 금기를 깨버린다. 이것이 마을 사람들에게 삭제되었던 기억을 되찾아주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조너스는 기억보유자에서 기억전달자가 되는 선택한다. 


조너스가 마을의 경계를 넘을 때도 임무해제가 될 운명의 아기 ‘가브리엘’과 함께 했다. 잘못된 사회 정책으로 인해 희생될 아이들 데리고 간 것은 임무해제에 대한 맹렬한 저항이자 투쟁이다. 인간을 위한다면서 곧 인간을 쉽게 죽이는 기괴함, 그 아이러니에 대한 투쟁 말이다.


플라톤은 조너스처럼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철학자’라 했다. 플라톤의 ‘철인 철학’의 핵심도 실체를 바로 깨닫고 진짜 세상을 알게 된 사람은 동굴로 돌아가 다른 죄수들에게 자유를 주고 그들을 계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진짜의 세계로 이끄는 철학자야말로 진정한 국가 통치자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논리다. 이런 면에서 조너스는 플라톤의 철학자의 분신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조너스가 디스토피아라고 인식했던 작품 속 마을은 플라톤의 ‘국가’에서 제시하고 있는 유토피아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모습이었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이상국은 국법에 의해 우생학적 사람들끼리의 결혼이 이뤄지며 이곳에서 태어나는 아이도 출생과 동시에 모친의 품에서 떨어져 공동 육아소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아이들 가운데서 우수한 아이들은 양질의 교육을 받고 국가 통치 계급으로 길러진다. 이때 아이들의 올바른 교육을 위해서 검열된 지식만을 가르치고 개인의 자유와 개성은 철저히 제한한다. 이렇게 엘리트 지배 계급을 양산하는 시스템을 갖춘 곳이 바로 플라톤이 말하는 ‘유토피아’다. 



조너스와 플라톤의 마을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인간의 행복이 ‘자유’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국가의 ‘통제’가 보장해주는 것인지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조너스는 인권이 유린되고 인간의 자유가 억압된 상황을 통해 마을을 디스토피아로 보고 있고 플라톤은 국가 권력이 국민의 자유를 통제한다고 할지라도 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쓰인다면 이곳을 유토피아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좋아 보이는 사회는 인간의 최소한의 불행을 막아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인간의 감정이 통제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인간의 행복은 이를 누리는 주체에 의해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이순영 칼럼니스트/https://edu.chosun.com/site/data/html_dir/2023/09/20/20230920801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