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원 칼럼] 2020 교육을 결산한다...코로나 덕분에, 코로나 때문에
By. 관리자
2020-12-16
[에듀인뉴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역사상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코로나 이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면서 역사를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교육도 예외가 아니다.
2020년의 교육계는 시작부터 끝까지 결국 코로나며, 수많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을 쏟아 내었다.
한 학년이 마무리 되어가는 시점이지만 끝내 학생 얼굴 한 번 못 보고 해를 넘기게 된다. 6월에야 등교를 시작했고, 그나마 1/3 등교였으니 학생들 만난 날이라고는 다 합쳐서 한 달 조금 넘는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얼굴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만 보았을 뿐. 그나마 온갖 방역지침, 행동수칙 지키게 만드느라 살가운 대화 한 번 나눠 보지 못했다.
거의 모든 교사들은 학교를 ‘만남의 장소’, ‘모임의 장소’로 생각했다. 그리고 교육은 이 만남과 모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아니 믿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건 공리이자 교육의 정의에 속하는 것이니 의식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 제1의 원리가 무너졌다. ‘사상 유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교육은 어떻게든 이어져 왔다. 학생들은 학교, 그리고 교사와의 만남을 어떻게든 이루어 냈고, 그 존재감을 확인했다. 비록 혼란스럽고 빈구석이 많이 보이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공교육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게 버텨 낸 것이다.
이는 한국 전쟁 당시 천막학교와 비견할만한 큰 일이다. 더구나 단지 버티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가 아니었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우리 교육의 가능성까지 찾아내었다.
코로나19 덕분에 발견한 가능성들
코로나 19 덕분에 발견한 우리 교육의 새로운 가능성 중 가장 큰 것은 미래교육, 사이버교육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려한 구호, 요란한 기술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코로나 19 상황에서 우리 교육은 이 기본적인 것들에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교육에 전념하는 학교의 가능성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은 교사다. 그리고 훌륭한 교육은 교사가 교육에 전념할 수 있들 때 가능하다. 그런데 그 동안 우리나라 학교는 이 기본적인 것부터 지켜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우리나라 교사는 교육이 아니라 잡무라 불리는 각종 행정업무에 시달려왔다. 교육부,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각종 정책사업은 늘어만 갔고, 갈수록 배보다 커지는 배꼽에 교사들의 전문성과 정열은 질식했다.
특히 정보, 돌봄, 복지 등 교육 이외의 기능이 학교에 부가되고, 담당 인력은 충원되지 않으면서 새로운 일들이 고스란히 교사에게 전가되었다. 이게 잘못되었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힘 없는 원칙론일 뿐, 어쨌든 누군가가 해야 하는 불가피한 일이라는 현실론에 밀려 교사들은 갈수록 늘어나는 잡무들을 담당해야 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코로나19 때문에 많은 정책사업들이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다. 교사를 생각해서라기 보다는 집합이 금지되고 제한된 덕분이다. 이에 따라 교사의 행정사무들이 상당수 폐지, 유예, 간소화하였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면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교사들은 처음으로 수업 준비를 위해 많은 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은 신선하고 짜릿했다. 더구나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업무들은 막상 시행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부분 쓸모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교사 역량의 재발견
코로나19로 인한 아수라장 속에 많은 사람들은 교사들의 적응능력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들이 생각하는 교사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정보통신 기술에 무능한 퇴물이나 다름 없었다. 우리나라는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교사의 능력과 열정을 폄하하는 분위기가 이어져 왔다.
“교사가 무능하니 학원에 간다”라는 식의 20년 전이나 통할 말들이 아직도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미 교직은 세대교체된지 오래다.
1989년 교단에 신선한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던 전교조 세대 교사들이 이미 퇴직하거나 퇴직을 앞두고 있을 정도다. 지난 10년 사이에 입직한 젊은 교사들은 그 시절 신선한 것으로 여겨졌던 정도는 기본으로 장착한 세대다. 그리고 코로나19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그것을 드러낼 기회를 주었다.
학생이 학교에 올 수 없게 된 사상 초유의 상황에서도 우리나라 교사들은 그 어느 직종보다 창조적이고 열정적으로 이 사태에 대응하고 적응하였다. 교육부는 아무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온라인 개학을 선포했지만, 일선 교사들은 와이파이 하나 없는 교실에서 갖가지 아이디어를 쥐어 짜서 어떻게든 온라인으로라도 공교육의 끈이 끊어지는 것을 막았고, 끈질긴 전화와 SNS로 학생과의 연결망을 지켜냈다.
심지어 등교수업과 원격수업이 교차되던 2020년 하반기에는 온오프라인을 결합하는 등 새로운 수업실험을 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물론 학부모는 여전히 온라인 수업에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온라인 수업이 어떤 여건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알았다면 그런 마음에 대해 미안해 할 것이며, 그래야 한다. 그야 말로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돈을 들여가며 장비와 프로그램을 구입하고 배워가며 만든 것이다.
10분짜리 동영상 하나라고 쉽게 말하지만 평생 동영상이라고는 찍어 본적도 없는 고경력 교사들이 몇시간씩 배워가면서 찍고 편집한 것이다. 열정없는 교사들이라면 자기 돈을 들여가며 장비를 구입하고, 난생 처음 접해보는 장비와 프로그램 사용법을 배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지원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그냥 주저앉아버리고 정부 탓을 하고 말지. 우리나라 학교와 교사는 생각보다 강하고 유능하다. 만약 그 동안 공교육의 산출이 불만족스러웠다면 그건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였을 것이다.
코로나가 드러낸 교육의 민낯들
코로나19 덕분에 감추어져 있는 우리 교육의 장점이 드러난 것 만큼이나 부끄러운 민낯도 많이 드러났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역행하는 교실 밀집도
지난 10년 사이 학급당 인원수는 계속 감소 추세를 이어갔다. 2016년 경에는 서울지역에서 조차 학급당 인원이 20명 정도로 줄어드는 학교들이 나왔고, 2019년에는 20명 이내인 학교들도 적지 않았다.
만약 이 추세를 그대로 두었더라면 대도시 학교라도 학급당 인원이 15명 정도가 되어 온라인 개학이니 1/3 등교니 하는 것들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교실 안에서 저절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학생수가 줄어들더라도 학급수, 교원수를 유지하여 학급당 인원수를 15명으로 낮추어 OECD최고 수준으로 만들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막상 정부가 출범하고 나자 장차 다가올 인구절벽에 맞춰 교원 수급을 미리 맞춰야 한다며 야금야금 교원 정원을 감축하고 학급당 인원수를 늘렸다. 그리하여 2020년 경에는 도로 2015년 수준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덕분에 코로나19라는 되치기를 당하고 말았다.
열악한 ICT 인프라, ICT 소양
그 동안 우리는 “대한인국은 정보통신 (IT) 강국”이라는 자부심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 19는 학교에 관한한 그런 자부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우리나라 학교는 정보통신기술의 사각지대나 다름 없었다. 우선 교실에는 와이파이가 없다. 우리가 정보통신기술 라이벌로 생각하는 타이완만 해도 산간 벽지 학교까지 모든 교실에 와이파이가 터지고, 용량 부족에 대비해 와이파이 도시락, 에그까지 비치되어 있다. 이 정도는 되어야 IT강국이다.
물론 학교 이외의 장소, 가령 동네 카페, 교사 자택 등의 정보통신 인프라는 훌륭하게 잘 갖춰져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육관료들은 학생이 재택수업을 하더라도 교사가 재택 근무 하는 일을 한사코 가로막았다. 눈 앞에 안 보이면 통제하는 기분이 안 느껴져서 그랬을까?
덕분에 교사들은 차라리 집에서 했다면 별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었던 온라인 수업을 와이파이도 장비도 없는 학교 교실에서 어떻게든 되게 하느라 별별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언론은 이런 사정도 모르고 어째서 실시간 온라인 수업을 안하느냐며 타박만 했다.
인프라 뿐 아니라 정보통신 소양도 낮았다. 어른들은 물론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소년들이니 정보통신 기술에 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상당수 학생들이 기초적인 검색이나 게임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런 장비들을 활용하여 학습할 수 있는 소양이 있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학생들 탓이 아니다.
그 동안 학교에서 이런 정보통신기기 활용 교육을 적극적으로 했어야 했지만, 문제는 학교의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소위 관리자급 교원, 그리고 교육 관료들의 ICT소양이 처참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학교 관리자들은 학생들의 정보통신기기를 규제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다. 등교하자마자 휴대폰을 수거하고 하교할 때나 되어야 나눠주는 학교에서 무슨 정보통신기기 활용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심지어 메신저 보고를 “버르장 머리 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고 대면보고를 요구하는 관리자와 관료들이 널려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온라인 학교, 미래학교? 꿈같은 이야기다.
시대에 뒤떨어진 교육행정
무엇보다 이번 코로나 국면에서 드러난 가장 뼈아픈 우리 교육의 치부는 위기 상황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기는 커녕 없느니만 못했던 교육부, 교육청, 교장, 교감 등 교육 행정의 낙후성이었다. 이들은 그 동안 교사들의 다양한 시도를 격려하고 지원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나중에 자기들이 문책 당하지 않을 방법에만 몰두 하는 소극 행정의 달인들임을 스스로 폭로했다.
이 위기 상황에서 교사들에게 길을 보여주고 안심하고 따라오라고 이끌 역량 따위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들은 선구적인 교사들의 노력으로 간신히 정책된 온라인 수업을 마치 자기네 공적인양 발표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수많은 교사들의 빈축과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 동안 교육 관료들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던 공문수발 시스템 역시 정보 및 의사 소통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다. 도리어 인터넷 시대에 웬 파발마냐는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한 발, 아니 두 발, 세 발 늦는 공문 때문에 교사들은 다음주 학사 일정이나 바뀐 사항을 네이버 속보나 맘카페 게시판을 보고 미리 짐작해서 대응해야 했다. 빛의 속도로 정보가 오가는 시대, 권한 분산과 유연한 조직이 요구되는 시대에 우리 학교를 지배하는 관료주의와 교육행정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코로나 19 덕분에 온 세상에 울려퍼진 셈이니 불행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대체 코로나 19라는 비상 상황이 터지기 전에는 왜 이런 문제들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아무리 엉터리 없는 정책사업, 행정조치라도 교사들이 어떻게되는 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만큼 교육에 들어가야 할 힘을 빼돌린 셈이다. 하지만 이 보다 더 큰 이유는 세상이 그만큼 학교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자기 자녀의 ‘등수’에만 관심이 있을 뿐, 막상 그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일, 무엇보다 자기 자녀를 가르쳐야 하는 교사들이 겪는 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심지어 교사가 수업하고, 학생지도하고, 평가하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한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교육에 그렇게 관심이 많다는 학부모들이 막상 소중한 자기 자녀를 가르치는 교사를 엉뚱한 일로 소진시키는 데 대해서는 민원 하나 넣지 않았다.
학력 격차
그리고 마침내 학력 격차 문제다. 이건 널리 알려진 문제다. 코로나19로 인해 원격수업 기간이 길어지면서 학력 격차가 더 커졌다는 뉴스가 연일 방송을 두드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막상 원격수업이 학력격차를 벌어지게 만든 원인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원격수업 때문에 이미 존재하던 학력격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가능성이 더 클 수도 있다.
특히 이번에 벌어진 학력격차는 기초학력 부진 학생들의 학력이 더 떨어지면서 발생한 경우가 많았다. 기초학력은 자기관리 능력 그리고 어른과의 적절한 상호작용 경험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그래서 기초학력은 교사가 하라는 거 빠짐없이 하기만 해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 등교수업이 이루어질때는 자기관리능력이나 어른과의 적절한 경험이 부족한 학생들을 어떻게든 챙겨서 “하라는 거 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소위 기본 점수라도 받는다.
하지만 원격 수업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전화로 문자로 메신저로 아무리 닥달을 해 본들, 눈 앞에 없는 학생을 억지로라도 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나마 전화나 문자에 답이나 하면 다행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벌어지는 격차가 부모의 경제적 지위와 함수관계를 이룰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는 원격수업에 사용하는 장비도 훌륭하고 부모도 관심을 가지고 챙길 수 있다. 반면 경제적 여유가 없는 가정은 코로나 19 때문에 사정이 더 나빠지면서 학생이 가정에서 그야말로 방치되어 버리기 쉽다. 이렇게 되면 교육을 매개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지면 곤란하다.
사실 우리나라는 OECD에서 부모의 경제적 지위와 자녀의 학업성취간 상관관계가 가장 낮은 나라에 속했다. 계층을 불문하고 공교육이 평등하게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강남구라고 더 많은 연봉으로 유능한 교사를 스카웃 해 온다거나 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 미국 처럼 지역마다 학교마다 교사 처우가 천차만별인 그런 시스템이 아니다.
오히려 우수한 교사들을 차별없이 골고루 배당함으로써 가정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그런 시스템이다. 그러니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는 상황은 어려운 학생들에게 특히 저소득층의 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에게 더 큰 피해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문제만큼은 코로나 19 국면이 마무리 된 다음 잊지말고 반드시 점검하고 해결해야 한다.
수능의 종말
2020년 교육계의 가장 큰 이슈는 그 동안 교육 쟁점의 끝판왕으로 버티고 있었던 대입, 그 중에서 수능의 위세가 현저히 꺾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달을 미루었다 치러진 수능이지만 무려 15% 가까이 되는 학생들이 결시했다. 애초에 응시를 포기한 학생들까지 감안하면 그 비율은 더 커질 것이다.
덕분에 1등급 따기가 그만큼 어려워져 상위권 학생들의 스트레스가 곱절로 늘어났고, 응시생 중 재학생 비율은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이번 수능은 거의 재수생 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데 이 말은 다시 말해 그 동안 많은 학생들이 상위권 학생들의 1등급 획득을 용이하게 하도록 머리수를 보태주고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수능 점수를 의미있게 활용하여 대학에 진학할 학생들은 전체의 20%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수능에 응시했던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종교적 권위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생이라면 당연히 통과의례처럼 수능을 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능이 코로나19의 3차 유행 한 가운데서 치러진 덕분에 많은 학생들이 그 위험을 무릎쓸만한 가치가 수능에 있느냐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고민은 코로나 국면이 끝난 다음에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일단 신화는 의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면 무너진다.
앞으로 갈수록 많은 학생들이 수능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현 정권은 2017-2019년 교육혁신의 황금기를 대입논란으로 허송하고, 심지어 그것도 수능정시 확대라는 퇴행적인 정책으로 물러 앉은 바 있다. 그런데 그렇게 물러 선 자리마저 무너지고 있다. 누구도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들 한다. 그것은 수능에게도, 그리고 수능에 붙어먹던 사교육 업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도전이냐 회피냐?
코로나로 시작되어 코로나로 끝난 2020년은 우리 교육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감춰진 민낯도 꺼내 보여주었다. 이는 우리 교육에 크나큰 기회이자 도전이다. 기회가 주어진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도전으로 받아들이냐, 아니면 회피하고 외면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육정책을 결정할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외면하고 회피하려는 세력들의 목소리가 더 많이 전해지는 것 같다. 바로 관료들과 사교육업자다.
이 정권은 출범이래 지금까지 철저하게 교사패싱으로 일관해왔다. 그렇다고 교사를 압도할 수 있는 비전과 전문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들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관료나 사교육업자의 소리일 수 밖에 없었다.
관료들을 지배하는 정서는 두려움과 걱정이다. 그 중 가장 큰 걱정은 교사에 대한 지배력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그들의 존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일제강점기때 민족교육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교육관료제다. 교사 통제야 말로 존립 근거나 다름없다.
그들이 교사를 지배하는 동력 역시 두려움과 걱정이다. 그들은 교사들이 늘 뭔가 걱정하고 겁먹어 있기를 바란다. 실제로 기성세대 교사들 중에는 늘 윗선의 눈치를 보고 보이지 않는 눈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교사가 가르치는 교육에서는 늘 걱정하고 겁먹고 있는 학생들이 자란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이 모범생이 되어 다시 교사가 된다. 이런 나라에서 창조와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행히도 우리나라 교사들 중에는 관료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 교육이 이 나마의 성취라도 이루어 낸 것은 바로 그런 교사들 덕분이다.
더욱이 요즘 교직에 들어서는 밀레니얼 교사들은 태생적으로 겁이 없다. 관료들을 웃사람으로 존경하지도 않는다. 코로나19 덕분에 소위 교육계 웃사람들의 수준에 대해서도 빤히 알게 되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이렇게 밑천 다 드러난 낡은 세력이 이들 젊은 교사들에게 어떻게든 권력을 유지하려 윽박지르다 그만 교단을 떠나게 만드는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평생직장, 안정된 일자리에 집착 하지 않으니 말이다.
여기에 희망을 걸어보자. 이들의 목소리를 키워 보자.